고영근 홈페이지 Welcome to ko, Young-kun's Room

 


 

본인은 그 사이 『국어의 통사의미론』(탑출판사, 1983), 『국어학연구사』(학연사, 1985), 『북한의 말과 글』(1989). 『국어학신연구』(탑출판사, 1986)ㅡ , 『국어학100년사』(일조각, 1992) 등 많은 책을 편집하였음. 위의 책에 기고한 분들의 논문에 대하여 의문나는 것이 있으시면 기고자들에게 연락하여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음. 본인은 지난 2002년도 제2학기에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본인의 정년 논문집 『문법과 텍스트』을 읽고 미심쩍은 문제가 있으면 기고자와 메일을 통하여 질의하고 응답하도록 하는 토론의 광장을 마련하였던 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음. 다음에  기고자와 학생들이 주고 받은 토론 내용을 보이니 참고할 것.

*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기고자와의 토론

  다음의 질의응답은 2002년 2학기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의 「한국텍스트과학특강」에서 고영근 교수의 정년기념으로 나온 『문법과 텍스트』(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의 제5부를 읽고 기고자와 주고받은 질의와 응답을 정리한 것입니다. 많은 열람을 기대합니다.

장경희, 국어의 지시화행에 대한 응대수행의 방법

장경희 선생님께

두가지 질문이 있읍니다..

첫째, 이 논문에서는 지시 화행에 대한 응대 양상을 수락과 거절에 따라 나누어 살펴보고 있는데, 지시 화행의 유형에 따른 응대 양상은 따로  다루지는 않고 있는 듯 합니다. 지시 화행의 유형을 언어 형식과 내용에 따라 2.1.2에서 명령, 요청, 애원, 부탁 등으로 나누고 있지만, 응대 양상 분석에서는 이러한 지시 화행의 유형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시 화행의 유형에 따라, 응대의 양상도 달라질 것으로 예측되는데, 선생님의 의도는 어떤 것인지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둘째, 이 논문에서 예시되는 예문은 선생님께서 임의적으로 만드신 것인지, 아니면 실제 코퍼스에서 인용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특히 간투사 '아이'가 사용되는 문장들(예: 아이. 몰라. 난 못해...)에 대해 여학생들은 근래에 이런 간투사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서울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

☞ 제 논문을 읽어 주고 질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시화행에 대한 응대는 가장 전형적인 경우만을 일단 다루었습니다. 응대는 다양한 것 같습니다. 전반적인 것은 새로이 쓰고 있는 중입니다. 예문들은 제가 가지고 있는 녹화 자료들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어 정리한 것들입니다. 대답이 되었는지요. 어느 때보다도 좋은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2002. 12. 14. 장경희).

 

양명희, 텍스트이론과 만화

양명희 선생님께

선생님께서 쓰신 「텍스트 이론과 만화」는 참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 논문을 읽고 함께 얘기하던 중에 논문에서 만화의 글간의 응집성은 다루고 계신데 한 텍스트 안에서의 글과 그림사이에 존재하는 응집성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분석을 해 볼 수 있을지는 논문에서 찾을 수가 없어서 선생님께서 그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했습니다. 만화의 기본 요소인 글과 그림 사이에 존재하는 응결성과 응집성을 통한 텍스트성에 관한 논의를 기존의 기준외에 다른 조건들이 더 있을 듯한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것들을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서울대학교 국문과 석사과정 정동경)

☞ 글과 그림 간의 응집성 뿐 아니라 그림 간의 응집성도 텍스트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요.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생각하여 만화를 그린다고 합니다. 연결되는 컷 간의 그림이 연결이 안 된다든지 글과 그림 간에 관련(응집성)이 부족하다면 좋은 만화가 될 수 없겠지요. 논문을 쓸 당시에는 글과 그림, 그림 간까지는 다룰 시간이 없었어요. 내 논문을 발전시켜서 그것까지 논의해 준다면 고맙겠네요. 그러려면 아무래도 만화에 대한 공부도 해야 할 것 같아요. 요즘은 대학에 만화학과가 많이 있으니까 그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텍스트언어학에서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분석 기준이 너무 단순하다는 겁니다. 외국 학자들이 연구한 분석 기준보다 더 세밀하고 설득력이 있는 분석 기준이 연구되기를 바랍니다.(양명희).

 

윤석민, 월인천강지곡의 텍스트 형성 규칙

윤석민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 국문과 국어학전공 석사과정생인 안소진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번 학기에 듣고 있는 고영근 선생님의 텍스트언어학 수업에서 『문법과 텍스트』에 실린 선생님 논문 「월인천강지곡'의 텍스트 형성 규칙」을 같이 읽었는데요. 다들 궁금해 하는 점이 있어서 질문드리려고 메일을 드립니다. 질문은 5장의 텍스트 수정과 관련된 부분에서 과연 텍스트를 수정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한가라는 문제입니다. 텍스트에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문제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저자의 글 혹은 작가의 작품인 텍스트를 ‘수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고 바람직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특히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의문을 가졌구요. 선생님께서는 텍스트 수정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답변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일로 보내 주시면 제가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럼 답장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 질문한 내용은 텍스트수정에 관한 문제였지요? 과연 작자에 의해 창작된 것을 수용자가 자의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인 것 같은데 맞나요?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래요.

텍스트수정이란 말 그대로 원텍스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전제할 것은 수정이 정말 올바른 방향을 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논외로 해야한다는 점이죠. 즉, 자의적인 텍스트 수정이 과연 모든 사람에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또 다른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텍스트 수정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텍스트는 이미 배웠겠지만 비록 작자에 의해 산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산출된 이상 더 이상 작자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자와 수용자 그리고 관련된 여러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수용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텍스트를 수정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만드는 행위(이를 후텍스트라고 할 수 있겠지요)는 올바른 수용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즉, 원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든 수용의 과정에서 텍스트 수정을 통하여 자신의 이해에 합당한 텍스트를 형성하는 것이지요. 사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작자의 작품을 읽는다 하더라도 다 겪는 것 아닌가요? 작자가 의도한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도 있고. 문제가 된 월인천강지곡의 수정은 특히 원텍스트의 일반적인 형성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수정하면 이해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제안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원텍스트를 고치자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수텍스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를 반영하자는 것입니다. 즉, 수용의 과정에서 문제가 있으니 수정하여 이해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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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기고자와의 토론

 

다음의 질의응답은 2002년 2학기에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의 「고대국어형태론연구」에서 고영근 교수의 정년기념으로 나온 『문법과 텍스트』(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의 1부부터 5부까지(고영근과 정광의 기고 제외)를 읽고 기고자와 주고받은 질의와 응답을 정리한 것입니다. 많은 열람을 기대합니다.

 

제2편 음운론과 자소론

고대 한국한자음에 대한 한 고찰

                                                              (권인한)

1. 신라 국호 표기에서 밝혀진 고대 한국 한자음의 장안음 모태설에 대해 다른 반례의 예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 첫째, 장안음 기층음설의 반례 문제인데요. 고대 고유명사 표기 자료나 15, 6세기의 중세 한국한자음 자료를 장안음 자료와 비교해 보면, 운모의 면에서는 신라국호 이표기예에서 보듯이 상당한 정도의 일치를 볼 수 있습니다만, 성모의 면에서는 일치되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 신라국호의 예에서 나타난 來母와 以母의 동음관계가 우선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중세 한국한자음에서의 경순음과 중순음의 미분화, 설상음과 설두음의 미분화, 치상음과 치두음의 미분화 등은 강신항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한국한자음의 장안음(중고한음) 이전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므로 이들도 장안음 기층음설의 중요한 반례로 지적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를 요약하자면 운모의 면에서는 장안음과의 일치를, 성모의 면에서는 장안음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인데요. 이것으로부터 저는 한국한자음의 형성 과정에서 성모적 특성은 일찍부터 고정된 반면에 운모적 특성은 중고한음에서 근대한음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의 변천을 겪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모의 면에서 위진 남북조음과 비슷한 특성이 나타나기도 하고, 장안음과 비슷한 특성, 심지어 근대한음과도 비슷한 특성들이 나타남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졸고 1997 한자음의 변화 등 참조 바람). 따라서 성모적인 면에서의 반례도 전체적인 면에서 그리 심각한 수준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같은 국호 표기에 다른 한자가 사용되었는데 그중 신라(新羅)가 많이 쓰인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요? 저희들은 아마도 그 한자의 의미가 가장 좋기 때문이 아닌가 하였는데 이에 대해 선생님께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 신라국호에서 '신라'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국가의 공인을 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시기에 대한 차이는 있으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모두 국왕의 승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 시기적으로도 가장 늦게 나타난 칭호의 하나라는 점입니다. 물론 여기에 의미적인 면에서의 정제도 그 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음운론과 형태론의 인접 현상

                                                              (권경근)

 

1. ‘어떤 영업 형태를 보이는 곳’의 의미를 갖는 ‘-방’ 의 기원을 김창섭(1996)의 견해를 따라 ‘아가방’으로 보는 이유?

☞ 상호인 아가방은 아가ㅅ방과는 기저가 다르다고 봅니다. 상호명은 아가+방의 유추적인 구성으로 보아야 하므로 기저형을 아가ㅅ방으로 설정할 수는 없습니다. 김창섭(1996: 37-38)에서도 사이시옷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 즉 [-방]이라는 발음까지 유추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이 생기고 있는 이러한 '-방'류의 낱말은 집이나 건물의 일부로서의 방이라는 의미보다는 새로운 영업형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낱말들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어휘사적인 조사가 필요한데, 김창섭(1996)에서 아가방을 제시하고 있기에 각주에 참고로 적은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어휘사적 조사가 요구됩니다. 이 경우 아가방은 '아가의 방, 아가가 있는 방'이라기보다는 '아가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 회사'로서의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이강훈의 견해에 대한 반박으로 재료의 의미를 갖는 ‘-집’의 예가 적절치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 구별자질에 의한 설명을 반박하는 가운데 잘못된 예를 넣었군요. 'ㄷ 삽입자질'을 지닌 '집' 등에 대한 예외를 의미적 기준으로 보강하려는 이강훈(1984: 146)의 내용을 반론하기 위한 예를 제시하려다 거기에 적힌 재료가 아닌 경우를 잘못 적어 넣었군요. 정정합니다. 그러나 의미적 기준이 보완되어도 이러한 방식으로는 판자집 등의 예외에 대한 처리가 어렵다고 봅니다.

 

3.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 원인을 돌리지 말라는 것과 어휘사적인 고려를 해야한다는 것이 상충되는 설명이 아닌가요?

☞ 사이시옷의 규칙적인 설명(속격 관계나 의미적 관계 등)에 예외가 되는 경우들을 단순히 역사적인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적어도 이러한 예외들이 하나의 패턴을 이룬다면 어떻게 이러한 구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는가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획일적인 기준으로 모든 낱말의 구성을 설명하기보다는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문에서 최근에 유추적으로 형성된 낱말들을 제시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낱말들의 구성은 적어도 기존에 설정된 기준으로는 적절하게 설명되기가 어렵습니다. 유추적으로 형성된 낱말들이 한 패턴을 이룬다면 여기에는 그러한 구성의 출발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어휘사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4. 유추와 규칙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 단어형성은 규칙적인 부분도 있고 유추적인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다양한 경로로 단어가 형성된다고 봅니다. 단어형성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규칙적인 단어 형성을 강조해 온 나머지 이러한 규칙에 어긋나는 것들을 예외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외들 가운데에는 유추적인 형성과정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로 경음화와 관련된 경우들을 다루었습니다.

 

제3편 형태론

중세·근대국어 형태론의 몇 문제

                                                                       (이현희)

1. 142p에서 '갈-/갇-'(아래아)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예로 드신 '싣-/실-(得)'를 말씀하셨는데 예를 몇 가지 드시고, 이런 사실을 토대로 『삼국유사』권2에서 사람 이름 '得烏失'을 '得烏谷'으로 달리 기록한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 『삼국유사』권2에서 '得烏失'을 '得烏谷'으로 달리 기록한 것은 '失'을 '谷'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문헌이 여러 번 전사를 거쳐 오다가 문자로 정착되었을 때는 오류가 생긴 것으로 이해됩니다. 원래는 '得[失]烏'([] 속은 협주)로 적혀야 할 것입니다. 물론 '得[谷]烏'도 마찬가지이지요. '得'은 '싣-/실-'인데 '谷'은 '실'인 것입니다. 그 인명은 '실오' 내지 '시로'를 의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쌍형 어간으로 볼 수 있는 형태들을 여러 개 예로 드셨는데 대부분 ㄷ, ㄹ 받침으로 끝나는 것들이었습니다. 예전에 학교 교과서에는 이러한 것들을 호전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는데 이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또 쌍형어간 가운데 ㄷ, ㄹ 받침을 가지지 않는 다른 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 아마도 논문 안에 안병희 선생님 등이 든 예를 언급한 것으로 아는데, '듣글'과 '드틀', '졈글-'과 '져믈-', '이긔-'와 '이기-' 등이 ㄷ 변칙동사 유형과는 관련이 없는 쌍형어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갇-/갈-'(아래아)이 오해되고 있는 데 대한 내 견해를 좀 강조해서 언급한 것입니다.

 

3. 조어법 기술에 있어 성조를 중요한 요소로 고려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슬믜다'의 경우 기존의 방식대로 합성이 되면서 성조가 바뀌는 것으로 보는 설명 방식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슬?-'와 '슳-'의 의미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성조에 맞추어 설명하려고 하면 크게 달라진 의미 변화를 설명하기가 매우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조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어 합성하는 과정에서 성조가 달라졌을 가능성을 고려해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는 '슬믜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계신데 선생님의 입장은 어떠신지요?

☞ '슬믜다'의 경우, 기존의 방식대로 합성이 되면서 성조가 바뀌는 것으로 보는 설명 방식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예전에 썼던 논문에서는 그렇게 기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고우ㅡㄴ숙 양처럼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나는 단지 성조 기술의 측면에서 다른 해석을 해 볼 가능성을 제시해 보았을 뿐이니까요.

 

11세기 문법형태들을 찾아서

                                                                 (김영욱)

 

1. p168에서 문제의 각필자로 드신 예 중에 '印'자가 있는데 이것이 하나의 단위인지,두 개의 단위인지 결정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경우의 것들은 차치하고 이 문제 하나만을 놓고 볼 때, 하나의 단위로 볼 때와 두 개의 단위로 보았을 때의 기능상의 차이가 생기는지요? 전체를 놓고 볼 때에는 이것을 몇 개의 단위로 볼 것인지가 큰 문제가 되겠지만 이 경우에만 국한하여 볼 때에도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지요?

☞ 기능상의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점토구결 문자 체계를 확립하는 데에 문제가 될 수 있지요. 물론 당시의 사람들도 문법 의식이 있었으므로 어떤 형태를 하나의 단위로 인식했는지를 밝힐 수 있다면 이것도 국어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2. p169에서 'ㅅ'자가 잘못되었다는 표시로 사용되었음을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와'라는 음가 표시에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을 볼 때, 과연 하나의 형태가 이렇게 전혀 다른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지요? 우리말에서 하나의 형태가 여러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 예는 많이 있지만 이와 같이 전혀 다른 차원의 기능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을지 궁금합니다.

☞ 이점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교정부호에 대한 연구인 셈이지요. 일본과 중국에도 이와 유사한 예들이 있는지를 검토할 수 있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정의 예가 특정한 문헌에서만 보인다면 그러한 문헌들의 계통을 밝히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겠지요. 화엄문의 요결에서는 또 다른 교정부호가 나타납니다. 'ㅅ'이 구결자 '와'와 형태는 같지만 그 기능이 다릅니다. 문법기능은 없고 원문교정의 지시문자라고 할 수 있지요. 지시문자에 대한 연구는 전례가 없는 듯합니다. 앞으로의 연구 과제 중의 하나겠지요. 동일한 음을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차자표기법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지시문자의 경우는 제가 알기로는 이것이 처음입니다.

 

3. 이것은 선생님의 논문 자체와는 상관이 없는 질문이지만 궁금하여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점토구결 자료에서는 글자 위에 점을 찍지 않아, 원래 의도한 위치에서 조금 비껴나는 다른 위치에 점을 찍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위치나 형태에 따라 다른 문법형태를 나타내는 점토구결자료에서 이렇게 원래 위치가 아닌 다른 위치에 점을 찍게 된다면 해석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럴 경우 앞뒤의 문맥과 점이 찍힌 위치 등을 고려하여 문법형태를 밝혀내겠지만 이 외에 정확한 위치를 가려내는 다른 방법이 또 있을까요?

☞ 앞으로의 연구 과제입니다. 그렇지만 다음의 기본 지침 아래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 해독자가 원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둘째, 동일한 유형에 대해서 통계적인 접근을 할 것.

셋째, 석독구결 자료 등 전후대의 자료와의 비교 대조 결과를 참조할 것.

 

단어를 바라보는 눈

                                                             (시정곤)

 

1. 202쪽에 제시되어 있는 네 단계 중 ?철수가?의 2단계를 형태론의 범위에 포함시키셨는데, (각주 3의 설명이 있지만) 이에 대해 ?철수가?는 ?이?와 ?가? 중에 ?가?로 구체적인 형태가 확정된 것이므로 음운론적 단계에 해당하므로 이는 음운론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질의입니다.

☞ 2단계를 형태론의 범위에 포함한다는 말은 1단계에서 2단계로 가는 과정, 즉 철수-주격이 ‘철수가’로 가는 과정까지를 형태론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201쪽에서도 자세히 설명을 했지만 음성구조까지의 절차를 가정했을 때, 추상적인 자질이 구체적인 형태로 결정되는(‘가’든 ‘이’든) 과정까지를 넓은 의미에서 형태론의 대상으로 보고자 한 것입니다.

 

2. 발화상의 최소자립형태는 굴절형태로서 이 굴절형태가 바로 단어이고, ‘철수, 철수가’가 자립성을 지님은 이들이 발화단위이기 때문이며 실제 기저형은 항상 굴절형태여야 한다고 설명하셨는데, 이에 대해 발화 단위라는 것은 ?표면형?에 대한 것이고 기저형이란 것은 ?심층형?에 대한 것으로서 단어의 개념 설정에 이렇게 ‘표면:심층’을 함께 고려하는 것에 무리가 없느냐 하는 질의입니다.

  <1>과 <2>는 음운론 전공 수강생의 질의였는데, 형태론의 연구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음운론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것은 아닌지, 음운론과 형태론의 처리를 평행하게 해야 하지 않는지 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 먼저 표층:심층을 구분한 이유는, 하나는 실제로 단어라고 할 때,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이를 보다 명확히 하고자 하여 구분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언어의 생성과정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주목한 굴절형태의 단어는 어휘부와 통사부, 음운부와 서로 관련이 된 것이기 때문에 표층과 심층의 구분이 있어야만 그 성격을 보다 명확히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음운론자들의 입장을 말씀하셨는데 각주 3에도 언급했지만 음운론자들은 형태교체론을 음운론에서 다루려고 하지요.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음운론에서는 음운자질, 음운체계, 음운현상(음운규칙)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 중에서 음운체계만이 실질적 대상이고, 다른 것들은 다른 부분과 중첩되거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음운자질은 음성학에, 음운현상은 대부분 형태론과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저는 엄밀한 의미에서 음운체계에 대한 연구가 음운론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 문법적 형태나 현상을 형태론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통사적 접사’나 ‘변이어’ 등과 같이 통사·화용적 층위까지 포함하거나 고려해야 하는 것에 무리가 없는지를 묻는 질의입니다.

☞ 질문대로 그러한 일이 간단한 작업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가만 들여다 보면, 문법의 모든 현상이나 설명들이 어느 한 부문에 한정되는 경우가 더 희박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사전의 어휘내항을 보아도 여러 정보를 모두 고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또 통사론의 많은 현상들도 화용적 요소를 많이 고려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만, 그리고 앞서 말한대로 음운현상들은 대부분 형태적 요소를 고려해야 하고요. 따라서 이러한 현상이 오히려 특이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이러한 것을 얼마나 이론적으로 잘 소화하느냐가 관건이기는 하겠지만요.

 

4. 각주 5(212쪽)에서 어소<밥>의 변이어로, ‘밥이’와 ‘밥을’, 그리고 ‘밥φ₁’(주격형)과 ‘밥φ₂’(목적격형)가 각각 통사적 조건에 따른 배타적 분포를 지니고 있다고 하셨고 ‘밥이’와 ‘밥φ₁’, ‘밥을’과 ‘밥φ₂’는 어떤 조건에서 구분되어 사용되는지 명확하지 않다고 설명하셨는데, 이에 대해  ‘밥이’와 ‘밥φ₁’, ‘밥을’과 ‘밥φ₂’의 실현 조건을 의미·화용적 조건이라고 볼 때, ‘변이어’가 통사적 조건과 의미·화용적 조건이라는 다른 차원의 조건에 의한 분포를 지닌다고 할 수 있으므로 ‘변이어’ 개념이 변이음이나 변이형태와는 평행하지 않은 것 같다는 질의입니다.

☞ 변이어가 변이음-변이형태 만큼 매끄럽게 균형을 이루지는 못한다는 것에 저도 동감입니다. 변이어는 통사, 화용적 조건까지도 고려해야 하므로 범위가 상대적으로 넓어져서 그렇겠죠. 논문에서도 그러한 문제를 밝혔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변이어라는 개념을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를 해 본 것은 다양하게 존재하는 단어의 개념을 어떻게 하면 한 데 아울러 설명해 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성’이라고 한 것이고요, 이 논문도 시고(試考)의 성격을 띤다고 한 것이죠. 만약 단어를 여러 문법 층위에서 바라본다면, 그리고 심층-표층이라는 대립적 개념을 사용한다면, 다소 매끄럽지는 않겠지만 어소-변이어의 대립개념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 때,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게 마련이겠죠. 얻는 것에 대해서는 212쪽에서 자세히 설명해 놓았는데, 이러한 논거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5. 각주 5(212쪽)에서 변이어가 통사적 조건이라는 배타적 분포를 지닌다고 설명하셨으나, 변이어(alloword) 설정과 관련하여 ?allo-?란 용어는 환경에 따른 교체를 나타내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므로 그 실현 환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변이어(allword)?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질의입니다.

☞ 제가 ‘alloword’를 사용한 것은 ‘변이음, 변이형태’와 맥락을 같이 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통사적 조건도 넓은 의미에서 환경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또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어휘란 의미가 계속 달라지는 것이므로 ‘allo-’란 접두사가 단지 ‘변이’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겠는지요?

 

6. 단어 개념에서 ‘발화상’이라는 조건을 적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러한 조건은 느슨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먹고 싶다’나 ‘국회 의원’등과 같은 구의 경우에도 발화 단위로서 완결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들도 하나의 단어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를 묻는 질의입니다.

☞‘발화상’이라는 조건이 느슨할 수도 있지만, 지적하신 ‘먹고 싶다’나 ‘국회의원’등은 그 구조 자체가 일반적 구와는 다른 것이어서 적절한 반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즉 ‘먹고 싶다’와 같은 ‘본용언+보조요언’은 크게 하나의 서술어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는 것을 보면(재구조화든, 통합이든), 완전한 통사적 단위라기보다는 형태적 단위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고요, ‘국회 의원’도 구인가 복합어인가를 구분하기 어려운 구조가 아닌가 합니다.  

 

7. 변이음이나 변이형태에서 그 대표형을 음소나 형태소로 설정하듯이 변이어에서도 그 대표형인 어소를 설정할 때 기준이나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무엇인지를 묻는 질의입니다.

☞ 변이어에서 ‘굴절접사’가 제외된 나머지 고정된 형태가 어소가 된다고 봅니다.

 

형태론에서의 논항 충족과 논항 전수

                                                                        (채현식)

 

1. 218쪽에 제시되어 있는 (1나)에 대한 것입니다. ‘귀걸이, 뒤꽂이’의 예에 대한 설명(219쪽)에서 동사의 [장소] 논항이 접미사에 의해 충족된다고 설명되어 있는데, 동사의 [장소] 논항은 ‘귀’나 ‘뒤’에 의해 충족되고 [대상] 논항이 접미사에 의해 충족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의입니다.

☞저도 이상해서 책을 찾아 보았습니다.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218쪽의 예문 (1나)는 ‘장소’가 아니라 ‘대상’이 굵게 표시되어 있어야 합니다. 곧 ‘걸-[동작주, 대상, 장소]: 귀걸이, 꽂-[동작주, 대상, 장소]:뒤꽂이’로 되어야 합니다. 219쪽의 설명에서도 ‘(1나)에서는 동사의 [대상] 논항이, .. 충족된다..’라고 해야 합니다. 부끄러운 실수를 했군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실수를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하다’의 위상을 위하여

                                                                   (김정남)

 

1. 선생님께서는 만하다1/만하다2를 하나로 통합하여 기술상의 편의를 말씀하셨는데, 그 근거로 이들이 통시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포가 동일하고 의미적으로나 형태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이들을 통합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때문에 기존의 분포에 의한 기존 사전에서과 같은 이들의 구분은 불필요하다고 하셨는데요. 비록 국어의 관형사형과 명사형이 동일한 동명사구문에서 출발하였다고는 하나 공시적인 언어현상에서 통시적인 언어사실을 근거로 든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이 논문의 주제가 (통시적인) 만하다의 사적인 특성을 하는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 통시적인 근거는 공시적인 기술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며 오히려 문법의 기술에 한 가지 측면만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인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있습니다.

고영근 선생님의 '총체서술'이라는 입장은 이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2. 하나의 어휘가 결합 과정에서 선행 형태를 달리하여도 사전에서는 그 어휘 자체의 의미와 기능이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면 한 어휘 항목 속에 넣지 따로 기술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 것으로 압니다.

☞ '보다'의 경우 '-어 보다'와 '-ㄴ가 보다'가 하나의 항목에 같이 들어 있습니다. 심지어 보조용언이 아닌 본용언 '보다'도 함께 기술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동사, 보조동사, 보조형용사가 함께 기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교할 때 '만하다'의 개별 기술은 그 의의가 없으며 일반적인 방법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형태소와 어소의 재론                          

                                            (최형용)

 

1. 선생님께서는 고영근(1993)의 형성소/구성소에 대한 어소 체계에 대해 단어와 문장차원으로 구분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영근(1993)의 체계는 구성소와 형성소의 중복된다는 점이 문제가 있다고 하시면서요.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견해에 동의를 하는데요. 만약 선생님 방식으로(270-271) 문장 또는 단어를 분석하게 된다면, 기존의 형태소나 고영근(1993)의 방식에서는 하나의 분석기제로 하나의 문장을 이루는 어소들을 분석할 수 있지만, 문장을 분석할때 각기 다른 층위에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문장 분석을 하고 다시 단어분석을 하게 되어 실질적인 기본단위로 분석하는데 있어서 두번의 적용절차가 요구됩니다. 그래서 실질/형식형태소냐 하는 식의 최소 단위로 분석하는데 있어서 한번의 기제로는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문장과 단어의 층위가 다르다고 할 때 실질적인 기본단위로 분석하는 데 있어 두 번의 적용절차가 요구된다는 문제점을 제시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문장의 최소 단위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하는 데서 비롯되는 결과인 것 같습니다. 가령 Bloomfield식으로 기존의 ‘형태소’의 확인이 최종 목표가 된다면 하나의 적용절차로도 충분하겠지요. 그래서 가령 ‘철수가 도둑질을 하다’와 같은 문장은 ‘철수, 가, 도둑, -질, 을, 하-, 다’와 같이 최종 분석하고 각각의 형태소를 기능에 따라 분류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철수, 가, 을, 하-, 다’의 경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들은 형태소의 자격을 가지고 문장의 ‘형성’에 참여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도둑’과 ‘-질’은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질’이 문장의 형성이나 구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이 ‘도둑’이라는 명사와 결합하여 ‘도둑질’로서 문장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면 ‘철수, 가, 을, 하-, 다’와 대등한 지위를 가지는 것은 ‘도둑, -질’이 아니고 ‘도둑질’이 아니겠습니까? (형태소의 측면에서는 ‘기능’을 문법형태소와 어휘형태소의 구별로 포착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바로 여기에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접미사 ‘-질’은 문법형태소입니까? 어휘형태소입니까?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이는 형태소 개념이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의미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문장과 단어의 층위를 나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문장과 단어의 형성이 그 기제에서 차이를 가진다는 점까지도 고려하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그 동안의 형태소는 이처럼 분석의 차원에서는 별다른 문제를 가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만 형성의 차원에서는 층위를 혼동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두 번의 적용절차가 요구되는 것은 층위를 엄밀히 구분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미 ‘-다’와 접미사 ‘-질’을 모두 의존형태소라고 묶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오히려 혼동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2. 형태소 개념은 보존되어야 한다고....(266-268) 하시면서 그 이유로 어소 이론으로는 자립성과 의존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소 이론을 체계화하는데 있어서 형태소의 분류방법처럼 자립어소/형식어소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어소개념으로도 자립과 형식형태소구분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 어소를 ‘자립어소/형식어소’로 나누면 어소개념으로도 자립과 형식형태소구분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어소’ 개념의 설정 이유를 흔들리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소 이론은 사실 ‘형성’의 관점을 중요시하기 위해 도입된 것입니다. 즉 문장이든 단어이든 ‘형성’의 측면에서 적극적인 것을 ‘형성소’, 그렇지 않은 것을 ‘구성소’라고 본 것이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어소’는 기본적으로 형태소의 분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형식의 자립성과 의존성보다 그 ‘기능’을 중시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똑같이 의존적이지만 어떤 것은 ‘형성’가 되고 또 어떤 것은 ‘구성소’가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구분하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점을 다시 무시해 버리는 ‘자립어소/형식어소’와 같은 개념은 오히려 혼돈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소 이론으로 자립성과 의존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어소가 자립성과 의존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데서 출발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자립성과 의존성이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은 아니고 이것은 형태소 개념으로 파악하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하면 될 것 같습니다.

 

3. 파생어와 합성어는 계열관계가 적용된다.(271-274)......를 설명하시면서 '힘들다'는 '힘이 들다'처럼 조사의 생략으로 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단어에 대한 직관으로 오히려 조사의 생략이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는 의견과 외국인을 한국어 교육에서도 이처럼 조사의 생략으로 설명하는 것이 용이하다고 하는 전공자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왜 이들을 조사의 생략으로 보지 않느냐에 대한 근거는 말씀이 없으셨거든요. 이점 설명 부탁드립니다.

☞ ?힘들다?는 ?힘이 들다?에서 조사의 생략과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만큼 얘기가 복잡합니다. 제 박사학위논문도 사실은 여기에 상당히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세한 것은, 죄송하지만, 제 논문을 참고하시면 될 듯하고 여기서는 질문과 관련되는 몇 가지만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우선 조사의 생략으로 단어가 형성된 것이라고 하면 이는 단어가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통사부에서 형성된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이미 Chomsky가 자신의 견해를 수용하여 어휘와 문장은 그 형성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조사의 생략(특히 격조사의 생략)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해당 구성의 의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전통 문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철수가’와 같은 구성을 그냥 NP와 같은 것으로 처리한 것이지요. 그러나 ‘착한 철수가’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러한 분석은 옳지 않습니다. ‘착한’은 ‘철수’에 걸리는 것이고 ‘가’는 ‘착한 철수’에 결합하며 ‘착한 철수’는 NP이지만 ‘착한 철수’를 주어로 만드는 것은 ‘가’이기 때문에, 즉 ‘착한 철수’의 분포를 결정하는 것은 ‘가’이기 때문에,  ‘가’를 분포의 핵(head)으로 삼는 분석을 취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즉 ‘가’를 K로 본다면 ‘착한 철수가’는 NP가 아닌 KP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동안 ‘철수가’와 ‘철수’를 별다른 차이가 없이 본 것은 ‘철수’를 분포의 핵이 아니라 어휘의 핵으로 간주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사는 단순히 생략의 대상이 아니며 적극적인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박진호(1994), ‘통사적 결합 관계와 논항구조’, 국어연구 123>와 <임홍빈·장소원(1995), 국어문법론 ,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조사의 생략으로 ‘힘들다’와 같은 단어가 생성된다고 했을 때 생기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그렇다면 같은 구조를 가지는 수많은 문장에서는 왜 ‘힘들다’와 같은 단어가 생기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조사의 생략으로 ‘힘들다’와 같은 단어를 생산할 때 과잉생성(overgenerating)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면 ‘앞서다’와 같은 단어는 조사의 생략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격 조사와 목적격 조사는 생략이 된다고 주장하는 경우에서도 ‘에’나 ‘으로’는 생략되지 않는 조사라고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러한 관점에서는 ‘앞서다’와 같은 경우를 ‘앞에 서다’에서 조사 ‘에’가 생략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조사의 생략과 관련하여 단어의 형성을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를, 제 학위논문을 참고하여 다음에 몇 가지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겉늙다, 겉익다, 겉핥다’ 등의 단어는 ‘겉이 늙다, 겉이 익다, 겉을 핥다’ 등에서는 도출이 불가능합니다. 통사적 구성과 연관이 된다면 이들 각각의 단어들은 ‘속’의 의미는 배제된다는 점에서 ‘겉만 늙다, 겉만 익다, 겉만 핥다’가 되어야 한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의미 기능을 가지는 보조사의 생략으로 단어가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문제점이 존재합니다. ‘모기물리다’라는 단어는 ‘모기에게 물리다’에서 ‘에게’가 탈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문제점이 존재합니다. 조사의 생략으로 단어의 형성을 논하는 경우에서도 조사 ‘에게’의 탈락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눈살피다’도 ‘눈으로 살피다’에서 ‘으로’가 탈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문제점이 존재합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생략되지 않는다고 인정되는 조사의 생략으로 그 형성 과정을 설명해야 하는 것으로 대등하게 연결된 합성 명사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즉 ‘눈얼음’은 ‘눈과 얼음’에서 ‘과’가 생략되고 ‘눈코’는 ‘눈과 코’에서 ‘과’가 생략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도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눈부시다’는 ‘눈에 부시다’나 ‘눈이 부시다’가 모두 가능하고 ‘눈부시게 차려입은 여자’의 경우는 ‘눈이/눈에 부시게 차려입은 여자’가 가능하지만 ‘눈부신 업적, 눈부신 활약’의 경우에는 ‘*눈이 부신 업적, *눈이 부신 활약’ 등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역시 조사의 생략으로 단어의 형성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흥미로운 예로 ‘시집가다, 시집보내다, 시집오다’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 의미상 ‘시집에 가다, 시집에 보내다, 시집에 오다’로 환원될 수 없고 만약 이를 통사적 구성으로 바꾼다면 각각 ‘시집을 가다, 시집을 보내다, 시집을 오다’로만 가능합니다. 이 때의 ‘을’은 ‘가다, 오다’를 고려할 때 전형적인 목적격 조사로 보기 어렵습니다. 조사의 실현형과 비실현형이 의미 차이를 보여 역시 조사의 생략을 가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주름잡다’는 ‘주름을 잡다’와 그 의미가 같지 않은데 전자는 ‘모든 일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주동이 되어 처리하다’의 의미를 가지지만 후자는 이러한 의미로 파악되기 어려운 것입니다(‘천하를 주름잡다/??천하를 주름을 잡다’). 조사가 함부로 생략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른바 관용적인 표현에서 더 두드러집니다. 그래서 가령 ‘애가 타다, 애를 녹이다, 애를 먹다, 애를 쓰다’의 통사적 구성에 대해 ‘애타다, 애먹다, 애쓰다’의 단어가 존재하는 데 비해 ‘*애녹다’는 존재하지 않는데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이유를 찾기 힘듭니다. 또한 ‘물 건너가다’에서는 이를 ‘물을 건너가다’로 목적격 조사를 삽입하면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엉덩이가 가볍다, 입이 가볍다, 작은 고추가 맵다’ 등에서는 주격 조사가 오히려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힘들다’와 같은 단어는 어휘부에서 의미적 개념인 ‘함수자(functor)-논항’ 관계를 충족시킴으로 인해 형성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도 제 학위논문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즉 굳이 ‘힘들다’와 같은 단어를 형성하기 위해 통사부까지 갔다고 다시 어휘부로 돌아올 필요는 없다고 보는 셈이지요.

 

문장형 고유명의 형태론

                                                                      (송원용)

 

1. 문장형 고유명을 형태부에 포함시킨다면 결국 문장까지도 형태부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까? 단어형성론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결국 문장형 고유명도 단어라고 보는 것일텐데, 그럼 다시 품사론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문장형 고유명 역시 고유명사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 품사론을 전개한다면 고유명은 고유명사라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제 학위논문에서는 고유명 대신 고유명사라는 용어를 사용했어요.

 

2. 어휘부를 확장하여 어휘부 내에서 통사적 구성의 단어들까지-그러니까 문장형고유명 같은 부류- 생산하는 것으로 처리할 수 없을까요? 어휘부에는 어쨌든 어미나 조사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고 실제 문장(어떤 명제를 표현하는 것)과 다른 이유, 예를 들면 '명명'이나 단일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이유들로 형성되는 단어류들을 어휘부에서 직접 형성한다고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통사론적 구성을 보이는 예들을 통사부보다 작은 단위인 형태부에서 다루는 무리함도 없어질 것 같은데요...

☞ 제 논문에서 어휘부는 단어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단어가 저장되고 인출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단어 형성을 관할하는 문법 부문이라기 보다는 단어의 저장과 인출이 일어나는 일종의 저장부이지요. 이 저장부의 핵심 요소는 의미와 형식입니다. 화자의 어휘 지식의 근간을 이루는 의미론적 관계망과 그 의미론적 관계망의 형식적 대응물인 형식적 관계망으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예를 들면 명명의 대상)이 화자의 의미론적 관계망 안에 자리 잡았을 때, 그 형식적 대응물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특정한 통사적 구성을 사용하는 것이지, 어휘부 안에서 그런 단어류가 직접 형성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제 학위논문에서는 이런 명명 과정을 통사론적 원리의 원용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저는 문장형 고유명사의 형성을 형태론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보다 통사부의 공시성과 형태부(제 논의에 따른다면 단어형성부)의 통시성을 구분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훨씬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3. 어휘부와 형태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시는 것인가요?  

☞어휘부가 다양한 어휘 정보가 저장되는 문법 부문이라면 형태부(단어 형성부)는 저장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연산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 학위논문에서는 단어 형성론을 크게 어휘부론, 단어형성과정론, 단어형성체계론으로 나누어 논의했는데, 그에 따른다면 형태부는 단어 형성 과정과 단어 형성 체계를 다루는 문법 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문장형 고유명의 경우 종래에 명사상당어구라고 했던 것으로 볼 수 없나요?  

☞ 문장형 고유명은 명사상당어구와는 다릅니다. 구체적인 논의 과정은 학위논문을 참고하십시오. 대략적으로 말씀드리면 문장형 고유명사는 어떤 경우에도 통사적 변형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통사적 변형이 가해지면 일반적인 통사적인 구가 되거나 다른 문장형 고유명사가 되어 의미가 본질적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 주된 논거입니다.

 

5. '어휘화(1988)'를 원자화와 규약화로 나누었는데, '어휘와(2001)'는 '통사론적 구성의 원자화'라고 하여 '어휘화(1998)'의 원자화의 개념에서 '학명의 명명' 부분만 제외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휘화(2001)' 역시 원자화와 규약화로 나누어져 있지만, 규약화는 독립된 개념으로 따로 처리되고 있는데 이러한 설정을 하게 된 이유가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수정된 어휘화를 원자화와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하여 고빈도 통사구성이 어휘부에 등재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머지 특수한 명명(고유명, 자연종명)은 규약화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그렇다면 어휘화(2001) 중 어휘화를 원자화와 규약화로 나눈 부분 역시 삭제되어야 하며, 어휘화가 원자화이고 규약화는 어휘화와는 다른 개념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결국 통시적인 어휘화는 원자화이고 공시적인 어휘화는 규약화라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 '어휘화'라는 용어는 어휘부에 등재된 단어가 다양한 이유로 내적 투명성을 잃는 과정을 포괄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고, 박진호(1994)에서와 같이 어휘부에 등재되지 않던 문법 단위가 어휘부에 등재되는 현상을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 제 논문은 박진호(1994)와 제 석사논문의 '어휘화' 개념이 가진 한계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논의입니다. 지적하신 바와 같이 고빈도 통사구성이 어휘부에 등재되는 현상과 명명 과정에서 통사구성이 직접 원용되는 현상은 명확히 구분되는 과정입니다. 이를 김창섭(1994)는 구의 통시적 단어화와 구의 공시적 단어화로 구분하기도 하였습니다. 제 학위논문에서는 임시어의 등재가 통사론적 구성이 단어의 지위를 획득하여 어휘부에 등재되는 과정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기존의 개념과 혼란을 낳아온 어휘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통사론적 구성의 단어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장형 고유명의 형성은 명명 과정에서 통사론적 원리를 원용한 것이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통사론적 구성이 공시적으로 단어화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어휘화라는 용어 안에서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제 생각이 문장형 고유명의 형태론에 간략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6. 문법화(허사화)를 어휘화의 한 갈래로 볼 수 없나요? 예를들면 '부터'나 중세어의 '이런다로' 같은 경우도 통사적 구성이 단어로 된 경우인데요...

☞ 일부 문법화는 통사론적 구성의 단어화의 한 부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사 '부터'의 문법화는 동사의 활용형 '부터'가 새로운 하나의 문법 단위로 어휘부에 등재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문법화가 통사론적 구성의 단어화인지는 문법화 현상 전반을 검토해봐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7.'반미, 친일'과 같은 임시어의 어휘부 등재과정은 완전히 제외된다고 하였는데(292쪽) 그럼 이런 임시어 부류들은 어디에서 다루어야 하나요?

☞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임시어의 어휘부 등재 과정은 어휘화에서 제외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임시어는 어휘부에 등재되기 전에도 문법적 지위가 이미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임시어의 형성은 공시적 단어 형성으로 단어 형성 체계의 한 축을 이루게 됩니다. 구체적 내용은 제 학위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신어(新語) 형성과 사용의 화용론

                                                                    (김진형)

 

1. 309쪽의 '컴시인'의 경우 '원시인'의 다른 말로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시인'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예로 '애자'라고 하면 '장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단어의 내부 구조와는 관계 없이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은어적인 느낌으로 사용하거나 비아냥이나 놀림의 함축을 나타내기 위한 용법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컴시인'을 만들기 위해 '원시인'에서 '시인'을 떼어냈다기 보다는 아이들이 사용하는 '시인'이라는 말을 바탕으로 단어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없을까요?

☞ 저는 ‘애자’라는 말은 최근에 많이 듣고 보았습니다만 ‘원시인’을 ‘시인’으로 줄여 말하기도 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나 ‘컴시인’을 만들기 위해 ‘원시인’에서 ‘시인’을 잘라 냈는지, 아니면 원래 사용되고 있던 ‘시인’을 가져다가 ‘컴’과 결합을 시켰는지는 확언하기 어렵겠군요. 논문을 쓸 때에는 물론 ‘시인’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지 몰랐으므로 후자와 같이 만들어졌으리라고 짐작할 여지는 없었겠지요. 다만 지금 제 생각에는 따로 쓰이는 ‘시인’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컴시인’을 만들어낸 재료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애자’의 경우, 어떤 화자가 ‘애자’의 의미를 모르는 청자에게 ‘너는 애자야’ 하고 말했을 때 화자는 청자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와중에 은근히 비하하는 쾌감을 맛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원시인’을 ‘시인’으로 줄여 말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직설적인 쾌감을 노린 것이 아니고 대부분 ‘애자’와 비슷한 효과를 노리는 때가 아닌가 짐작됩니다. 그런데 제 판단으로는 ‘컴시인’은 다소 직설적인 전달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으이구, 이 컴시인아!’라는 발화에서 ‘비하’나 ‘조롱’의 의미를 담을 수는 있겠지만 ‘애자’에서 노리는 은밀한 쾌감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지요. 물론 ‘애자’의 경우 너무나 일반화되어 지금은 그러한 은밀성이 퇴색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경우에는 과연 그러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은어적인 ‘은밀한’’전달효과를 가진 어휘재는 ‘컴시인’과 같은 새로운 복합어를 만들어내는 데 쓰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결국 ‘컴시인’은 컴퓨터’에서 ‘컴’과 ‘원시인’에서 ‘시인’을 일시적으로 분해하여 결합한 결과 생겨난 단어라고 봅니다. ‘컴시인’이라는 어휘가 생명력을 얻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 다음 문제이겠고요.

 

2. 306쪽의 '햄버거'에서 '버거'는 비정규적인 어휘재로 다른 새로운 단어를 만든 것으로 보고 '치킨버거, 피시버거... 불고기버거, 라이스버거' 등의 예를 제시하였습니다. 처음에 읽을때는 이런 비정규적인 어휘재의 사용이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것이라고 이해가 되어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실제 논문에는 그런 내용이 없으므로 '버거'를 어휘재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처음에는 비정규적인 어휘재였다고 해도 그 쓰임이 빈번하고 언중들의 공인을 얻으면서는 정규적인 어휘재로 볼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버거킹'의 경우도 '버거'를 사용하였고, 실제 사전에도 '-burger: … 을 쓴 햄버거식의 빵, …제(製)의 햄버거?란 뜻의 결합사. 예: cheeseburger 치즈버거'가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비정규적인 어휘재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 ‘버거’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예로 들었던 것은 아닌데 영어의 경우라는 단서를 달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오해를 살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언중이 오분석에 의해서든 고의적인 재분석에 의해서든 비정규적인 새 어휘재를 만들어내는 현상이 국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문맥에서 굳이 국어와 다른 언어를 구분하여 언급할 필요는 크지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버거’는 더 이상 비정규적인 어휘재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은 옳습니다. 영어에서 수입되었지만 ‘버거’가 국어에서도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버거’류를 만들어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이미 정규적인 어휘재의 지위를 획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과거에 그것이 생겨나게 된 절차가 비정규적인 분석에 의해서였다는 것이지요.

 

3. 304쪽 '고등학생→고등어→고딩'의 변화에서 고등어에서 고딩으로 바뀐 것은 타이핑의 수고도 줄이고 어감도 신선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저희가 알기로는 '고딩'이 먼저 있었고, '고등어'는 어떤 교복선전에선가 실제 고등어를 광고에 그림으로 넣어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즉 선후관계가 고딩이 먼저고 고등어는 그 고딩과 음감이 유사한 생선을 모델(?)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 이 문제는 과연 ‘고딩’이나 ‘고등어’가’ 언제부터 나타났는가, 그리고 어떤 것이 먼저인가가 명확해져야 답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등어’와 ‘고딩’가운데 실제로 어떤 것이 더 먼저 나타났는가를 분명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고등학생>고딩>고등어’의 순서보다는 ‘고등학생>고등어>(고딩어)>고딩’의 순서가 더 자연스러울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등어’는 이른바 ‘참신한 비유’에 의해 생겨난 말이 아닐까 합니다. ‘고등학생’보다는 음절도 짧고 어감도 간결한 인상을 주며, 은어적인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은어든 유행어든 자주 쓰이게 되면 음절이 점차 단축되고 원래의 형태에서 많이 멀어지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딩’은 바로 그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합니다. 또 ‘고등어>고딩어(혹은 고딩)’의 모음 변화는 모음 ‘ㅡ’가 자음 ‘ㄷ’과 조음위치가 가까운 ‘ㅣ’로 바뀐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그리고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광고에서 ‘고등어’를 접한 것은 제가 ‘고등학생’에 대해서 ‘고등어’나 ‘고딩’이란 말이 쓰인다는 것을 안 이후인 것 같습니다. 제 기억이 틀렸다면 위와 같은 제 추측의 설득력이 훨씬 약해지겠지만 제 추측에 개연성이 없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어떤 어휘의 구조적 짜임새나 다른 어휘재와 규칙적 결합 양상을 보이는 어휘재들에 더 관심을 집중하는 전통적인 형태론에서는 인간이 비정규적인 새 어휘를 만들어내는 데 작용하는 자연스러운 인지적, 심리적 과정에 대하여 관심이 적었습니다만 비정규적으로 보이는 어휘들의 분해, 결합 양상들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나름대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를 찾아내는 데에는 언어외적인 여러 가지 기제들이 고려될 필요가 있습니다. ‘고딩/고등어’와 같이 어떤 것이 선후냐는 것이 문제가 될 때에는 그 사실 자체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생 과정을 합리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 가능성까지 배제할 필요는 없겠지요. 제가 언어적인 경험도 풍부하지 못하고 형태론은 물론 화용론, 인지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데도 이 글을 썼던 것은 저를 비롯하여 이런 쪽에 관심을 크게 갖지 않았던 분들과 함께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제4편 통사론과 의미론

관형사형 어미 ‘-(았)던’의 의미에 대하여

                                                                    (이필영)

 

1. 질의 : ‘-(았)던’의 의미를 기술하기 위해 시점시라는 새로운 기준을 제안하셨는데, 시점시라는 기준으로 다른 문법현상도 설명해 낼 수 있다면 시점시의 설정이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점시로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문법현상이 있는지요?

☞ ‘시점시(視點時)’라는 것은 사실 내가 처음으로 제안한 것은 아니고, 최동주(1995)에서도 이미 언급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제 논문에서 인용한 김창섭(???)에도 ‘시점시’에 대한 생각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사실 지금 저는 이 논문들을 확인할 수 없는 처지라서 정확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시점시로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문법 현상(시상과 관련된 것이겠지요)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2. 질의 : 각주 19)에서, 일반적으로 [-완결성] 동사로 쓰이는 ‘뛰다’가 ‘벌써 운동장을 세 바퀴 다 뛰었다’라고 할 경우에 완결성이 느껴진다고 하셨는데, 이 때 ‘뛰다’의 의미 자질이 변했다기보다 ‘뛰다’는 여전히 [-완결성]의 자질을 가지고, 부사 ‘벌써’와 선어말어미 ‘-었-’에 의해 완결성이 표현된 것이라고 볼 가능성은 없는지요?

(각주19) 상적 특성은 궁극적으로 동사어간보다는 절의 내용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가다, 떨어지다’와 같은 동사들은 일반적으로는 [-순간성] 동사로 사용되지만, ‘지옥에 가다, 시험에 떨어지다’와 같이 사용될 때에는 [+순간성] 자질을 지니게 된다. ‘뛰다’ 역시 일반적으로는 [-완결성] 동사로 쓰이지만, ‘벌써 운동장을 세 바퀴 다 뛰었다’라고 할 경우에는 완결성이 느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들다’도 일반적으로는 [-결과성] 동사이지만, 일정한 양을 만들었다고 할 경우에는 결과성을 나타낼 수도 있다.

☞ 지적하신 내용에 공감합니다. ‘벌써 운동장을 세 바퀴 다 뛰었다’라고 할 때의 [완결성]은 ‘벌써’나 ‘다’와 ‘-었-’이 결합한 데서 비롯되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뛰다’라는 동사의 상적 자질이 바뀐 것이라고 하기는 곤란하겠지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에서 제가 말하려고 한 것도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즉 상적 특성을 동사의 어간만이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사를 포함한 그 밖의 상적 표현들에 의한 구성 전체가 나타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어 보니까 지적하신 것처럼 제 설명이 오해를 가져올 수가 있겠군요.

 

3-1. ‘-ø던’과 ‘-았던’은 상적인 측면에서도 구별되는데, ‘-ø던’은 [+지속성(-순간성)]인데 반해, ‘-았던’은 (12)에서와 같이 지속성을 반드시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았던’이 지속성을 요구할 수도 있다는 뜻인지요? ‘-았던’이 쓰인 예문 중에서 (12가)는 [+지속성]을 가진 문장인 반면, (12나)와 (13)은 [-지속성(+순간성)]을 가진 문장입니다. ‘지속성’을 반드시 요구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지속성을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는 뜻인지 아니면 (12)(13)에서처럼 동사의 지속성에 무관하게 결합하므로 ‘-았던’에 대해서는 지속성에 대한 요구조건이 없다는 뜻인지요?

3-2.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ø던’과 ‘-았던’이 지속상의 면에서 차이가 있다면 ‘-ø던’이 나타내는 지속성 자질은 ‘-던’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는데, ‘-ø던’이 [+지속성]임에 비해 ‘-았던’이 [+지속성]으로도 쓰이고 [-지속성]으로도 쓰인다면, 그러한 차이가 ‘-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가능성은 없는지요?

(12) 가. 어릴 때 자주 놀러 갔던 그 공원을 오늘 찾아가 보기로 했다.

     나. 어릴 때 한 번 놀러 갔던 그 공원을 오늘 찾아가 보기로 했다.

(13) 가. 작년에 모 대학 시험에 떨어졌던 철수는 금년에 그 대학에 다시 응시하여 합격했다.

     나. 지난번에는 그 사람 말에 반했던 철수가 이번에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 3-1: ‘-았던’은 [-지속성] 사태에도, [+지속성] 사태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았던’은 [지속성]과 무관한 셈입니다. 이것을 질문하신 표현대로 ‘지속성에 대한 요구조건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3-2: 물론 ‘-던’과 ‘-았던’의 상적 특성([지속성])의 차이는 ‘-았-’의 유무에 의해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의 상적 특성의 차이란 지속성의 유무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는 [+지속성]을, 후자는 [지속성]과 관계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던’의 경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자-(다)’가 [지속성]을 나타낼 수 있는 동사인 다음 예문에서 1가)는 지속성을 나타내는 데 비해서 1나)는 지속성과는 관계가 없어요.(이 말은 1나)가 [-지속성] 사태라는 것이 아닙니다)

1)가. 철수가 자-ψ-아-요 <현재일 경우>

  나. 철수가 자-았-어-요

즉 [지속성] 자질 동사의 경우, 그것이 현재형(즉 ?-았-?이 결여된 것)일 경우에는 언제나 [+지속성]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았-’이 결여된 형태가 미래의 사태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지속성]을 반드시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 ‘-던’은 시점시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현재형이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질문 : 예문 (15)에서 ‘결혼했던’에 ‘*’를 붙이셨는데, ‘*’보다 ‘?’가 더 적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15) 가. 작년에 *결혼했던, 결혼한 철수는 올해 예쁜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나. 어제 *죽었던, 죽은 사람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 문법을 기술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법성에 대한 판단은 누구나 일치하기 어려운 것이겠지요. 그래서 누구의 판단이 꼭 옳다고 고집할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하고는 있습니다만 좋은 안이 없습니다. 많은 자료를 통해서 통계로써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만.

그러나 지적하신 예문의 문법성에 대해서 말한다면, 아무래도 나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작년에 결혼했던 철수는 올해 예쁜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혹시 이 예문이, 결혼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하는 ?철수?라는 사람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 ‘작년에 결혼했던 철수’에 관한 내용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그것은 1회성 사태가 아닌 반복가능한 사태의 부류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문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달리 ‘철수’라는 사람이 한 사람뿐이라고 전제했을 경우에는 이 예문은 저에게는 어색할 뿐입니다.

어떤 예문에 대한 문법성 판단을 할 때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하겠지요. 그래서 억측을 해 보는 것입니다만, 위 예문에 대해 *보다 ?정도로 판단한 이유가 혹시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상황의 가능성을 포괄하여 판단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무리한 억측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참고로 이와 비슷한 경우의 예문들을 더 들어 보겠습니다.

  작년에 결혼했던 철수가 올해 취직했어요/ 취직할 거예요

  작년에 결혼했던 철수가 내년에 미국에 간대요

  작년에 결혼했던 철수는 제 대학 동창이에요

 

문법 기술을 위한 시점 연구

                                                                       (신선경)

 

1. 선생님께서 다중적 시점 구조를 설명해주시면서 (10)에서 화자 시점을 담화층위에서 설정해주셨는데 뒤이은 설명에서는 중립적 시점으로 화자 시점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저희 학생들은 (10)의 구조와 설명에서 오는 차이점에 아주 많이 헤맸습니다. 화자시점이 중립적 시점이라면 (17-나)에서 화자시점을 두 층위 모두에 설정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요?

☞ 화자 시점에 대한 질문

시점에 대한 본 논의의 주장은 다중적 시점 원리로 정리됩니다. 한 문장의 시점은 문장 층위와 담화 층위에서 다중적으로 주어지며 따라서 하나의 문장에 대하여 둘 이상의 시점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문장 층위에서는 동작주, 피동주 등의 상황 참여자 중 하나에 시점이 놓일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동작주가 피동주에 비해 시점을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17나)에서와 같이 화자 자신이 문장 층위의 시점에 대하여 매우 중립적인 태도를 갖게 될 때, 이는 억양이나 강세 표시 등 준언어적 성분에 의해 표시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문장 차원에서의 시점 해석이 보류되어 빈 자리로 남게 될 경우 화자 시점은 담화 층위의 시점이지만  다중적 시점 원리의 세번째 원리에 따라 빈 부분을 채우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화자 시점의 해석만이 가능한 문장으로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화자 시점이 담화 차원의 시점인 것은 사실이지만 시점 해석에서 한 층위의 시점 해석이 불확실해질 때 가장 우선적으로 채택되는 default 시점이라는 점에서 각 층위의 빈자리를 채우게 되는 것이지요.

 

2. 시점 설정에 동작주, 피동작주 개념을 도입하셨는데 이 개념들은 술어와의 상관성에서 해석된다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1-다)의 ?‘영희 남편이 영희를 때렸다’라는 예에서는 피동작주인 영희의 시점에서 기술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때렸다’ 자체를 본다면 동작주의 시점에서 문장 서술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요? 아니면 고유명사로 표현된 특정 대상의 개념으로 설명해야 되는 문장들이 아닐까요? 저희 학생들 중에는 이런 경우에는 문두에 나오는 요소가 우선적으로 1차적인 시점으로 분석된다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철수가 영희를 때렸다’ 문장에서의 시점 해석에 대한 질문

‘철수가 영희를 때렸다’라는 문장에서 ‘철수’와 ‘영희’는 각각 의미역에서 관계층위(thematic tier)와 작용층위(action tier)의 두 층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의미역을 갖습니다.(신선경 1998의 3-2장 참조/ Jackendoff(1990) 참조)

영희가       철수를     때렸다.

ThemeGoal     (관계층위)

Actor         Patient    (작용 층위)

이때 문장의 해석에 있어서 청자와 화자가 발화 상황에서 영희나 철수의 의미역에서 작용 층위에 대한 부분을 문제 삼아 시점 해석을 하게 된다면 17가)와 같은 (동작주 시점/ 화자 시점)의 해석이 가능할 것이며 만약 관계 층위만을 문제 삼게 된다면 17나)의 해석이 더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관계 층위만을 문제 삼는다면 ‘영희가 철수에게 맞았다’라는 문장이나 ‘영희가 철수를 때렸다’는 문장은 문장 층위의 시점에서 시점 해석상 차이를 갖지 못할 가능성도 있겠지요.

 

3. 문학에서 1인칭 시점, 3인칭 시점 등과는 어떤 관련을 맺을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 문학에서의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의 설명에 대한 질문

문학에서의 시점에 대한 것은 많이 생각해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1인칭 시점이나 3인칭 시점은 아마도 담화 층위의 시점과 문장 층위의 시점 간의 관계에 따라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자 시점과 행동주 시점이 동지표 관계를 갖는다든지, 담화 밖의 제 3자와 동지표 된다든지 하는 것에 따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4. 이 논문에서 시점에 대한 선생님만의 정의가 없어서 설명이 좀 더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물론 「형태론3-1」에 선생님께서 쓰신 논문으로 선생님의 시점 정의를 공부하였습니다.)

 

5. 고영근 선생님께서 (5)를 설명하시면서 지시대명사 ‘그’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고영근 선생님께서는 지시관형사라는 표현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6. 또 설화 장르라는 개념보다는 ‘서사’라고 해야 한다고 고영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4와 5와 6의 지적은 깊이 명심하여 좀더 잘 정리된 논문을 다시 한번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의 글 중 약간의 오타가 있어서 저희가 발견한 부분들만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 438쪽 각주 4에 내표 독자라고 하셨는데 내포 독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2. 441쪽에서 첫줄과 각주 6에 (7다)는 (11다)가 맞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중세국어 보어의 설정에 대하여

                                                                       (양정호)

 

1. '살다. 있다. 없다' 의 경우 보어가 필요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되는데요, 그 구분을 두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ex) 니가 살면 얼마나 살겠니?

옛날에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 '있다'와 '없다'의 경우에는 476쪽의 주10에서 '존재 자체가 문제되는 경우에는 처소 표현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보어 성분을 가정하기 어려운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보어가 필요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살다'의 경우에는 의미에 따라서 보어의 유무를 달리 기술해야 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居는 살씨라'와 같은 의미에서는 구체적 장소가 필요할 수 있고, '活은 살씨니'와 같은 의미에서는 구체적 장소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살다'의 사동사가 구체적 의미를 같는 경우와 추상적 의미를 갖는 경우에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평행적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제가 생각하는 것은 보어가 필요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인데, 논문에서의 기술은 보어가 필요한 경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중세국어에서 목적어 이외에 필수 논항이 반드시 설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보어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를 무시한 건 아닌데, '살다'의 경우에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보어가 없는 경우를 다루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중세국어에서의 용례들을 확인해 보면 -정확하게 숫자를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보어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더 일반적인 듯합니다. 다만 이것이 실제 언어의 모습인지, 아니면 불경이라는 특수성에 말미암아 '거주'보다는 '생사'가 언급되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아마도 후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있다', '없다', '살다'의 경우에 보어가 필요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는 것이 옳으며, 제 논문에서 이를 정확히 언급하지 못한 것은 제 부주의입니다.

 

2. 주로 처격과 장소표현만을 보어로 보고 있는데, 수단이나 방법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같은 질문일 수도 있겠는데요... 내재논항에서 대상역을 뺀 모든 성분이 보어인가요? '주다'의 경우 '~에게'에 해당하는 명사구도 보어로 보아야 하나요?

나는 버스로 학교에 간다.

영수는 영희에게 꽃을 주었다.

☞  주어를 논외로 할 때, 목적어를 제외한 나머지 필수성분은 모두 보어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다’의 경우에 ‘-에게’를 취하고 있는 성분이 보어입니다. 하지만 수단이나 방법을 나타내는 성분은 문장의 필수성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군요. 많은 용언을 대상으로 정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수단이나 방법과 관련된 표현은 모든 문장에서 수의적으로 쓰일 수 있는 듯합니다. 가령 ‘철수가 밥을 먹었다’와 같은 문장에 ‘주걱으로’ 같은 성분을 넣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열시에, 집에서’ 등과 같은 성분을 넣는 것과 유사하게 판단되는군요. ‘영수는 영희에게 꽃을 주었다’와 같은 문장에서도, 필요한 필수성분이 모두 나타난 것 같은데, ‘영수는 어제 집 앞에서 영희에게 꽃을 두 손으로 주었다’와 같이 수의적인 성분을 설정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수단이나 방법이 필수성분으로 생각되는 구문이 있다면 보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현재 저로서는 그런 예가 잘 떠오르지 않는군요.

 

3. 장소역을 보어로 볼 때 되다/아니다의 보어와 동등한 자격을 주는 것이 옳을까요?

☞ 동등한 자격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통사론적으로는 보어라는 동등한 자격을 가진다고 해야겠고, 의미론적으로는 물론 다르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되다’와 ‘아니다’의 경우에도 보어가 의미론적으로 서로 동등한 자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정확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되다’의 보어는 ‘결과’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아니다’의 보어는 ‘같지 않거나 혹은 속하지 않는 대상’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둘도 의미론적으로 대등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동등한 자격이란 통사론적인 자격에 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한데, 문장의 필수성분이면서 목적어가 아니라 보어이기 때문에 이 성분들은 통사론적으로 대등한 자격을 가진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4. '이다' 앞의 명사구로 볼 경우 생기는 문제가 몇가지 있는데요

(1) ‘이다’의 경우 보어에는 조사가 생략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올 수 없는데 보어의 설정 원칙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2) 명사구+이다=보어+서술어 라면 하나의 어절이 두 개의 문장성분으로 나뉘어져야 한다는 부담이 생깁니다.

☞ (1) ‘이다’의 보어는 조사를 절대로 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만, 이는 관찰적인 수준에서만 그렇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기존의 여러 논의들에서 조사가 항상 생략되거나 부정격으로 설명하는 것이 시도된 바 있기도 합니다.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이론적으로 타당할 것인지에 대해 신중히 검토한 이후에, 없다고 할 것인지,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할 것인지, 새로운 개념을 도입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저는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답변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보어는 명사 상당 어구와 조사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보어 설정 기준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조사가 있지만 보이지 않거나 부정격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고, 조사가 없다고 한다면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기준에 어긋난다고 해서 조사가 없을 수 있다는 가정을 버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처리가 이론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인정된다면 그렇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기준과 부합되지 않는 문제는, ‘이다’의 보어를 기준에 대한 예외로 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다’의 보어가 조사를 취하지 않는다고 해서 보어 설정 기준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하나의 예외를 두는 것이 무리한 처리가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2) 474쪽에 ‘ ‘이다’를 선행하는 체언에 붙여 쓴다는 표기법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면 형용사로 처리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답변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어절이라고 하는 것은 띄어쓰기를 한 단위를 가리키는 개념인데, 현행 맞춤법에서는 ‘이다’를 조사로 처리하기 때문에 ‘명사+이다’가 한 어절이 되지만, ‘이다’가 형용사라면 띄어쓰기를 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두 어절이 될 것입니다. 물론 명사와 ‘이다’사이를 띄는 것이 그리 편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절대로 띄어쓸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령 띄어쓰기가 바르게 된 ‘먹을 듯하다’와 그렇지 않은 ‘먹을듯 하다’ 가운데 저는 후자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만 맞춤법에서는 전자만 옳은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현행 맞춤법 규정에 따라서 ‘이다’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중세국어에서 형식명사 ‘이’는 선행하는 관형사형어미와 연철되었던 것을 고려할 때 표기가 문법적 검토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수식성분과 피수식성분이 분철되던 중세국어에서 관형사형어미와 ‘이’가 연철되었다고 해서 ‘이’를 명사가 아니라고 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는 점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질문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혔습니다만 답변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부적으로 여러 문제들이 존재하고 아직 정밀하게 더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중세국어에서 필수성분으로서의 보어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본고의 근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그런 근본 입장에 바탕해서 여러 문제점들을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느라(고)-' 택시스와 도와 지의 관점에서-

                                                             (이카라시 고이치)

 

1. 선생님께서는 실제적인 자료 연구로 통계 자료를 근거로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표3>의 변동률을 제시하셨는데요 저희들이 궁금한 것은 그러한 변동률이 이 표본 조사에서 얼마나 유의미한 값을 갖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통계 부분에서 좀더 보충 설명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 <표3>은 <표1>과 <표2>를 비교해 본 결과이고 회답이 전체적으로 변동된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표3>에서 1, 2, 5, 10 번의 변동이 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5 번은 첫번째 조사에서 a-b간의 차이(79.3%-12.1%)가 67.2%로 가장 안정되었지만 -16.7%(-10)로 가장 시함 변동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7, 8 번은 변동률이 낮았지만 <표1>과 <표2>에서 [원인,이유][의도]가 애매하다는 비율 높은 예입니다. 또한 c와 d에서도 변동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표3>은 의미 판단이 변동된다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언어의식에 대한 사실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2. <그림 3>에서는 택시스의 설명에서 전건에 "고치다"라고 하셨는데 (13)의 예를 확인해보면 "붙이다"가 맞는 것 같습니다.

☞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림2>에서 쓴 "고치다"를 그냥 복사해 버린 것 같습니다.

 

3. <그림 3>의 [동시(일환)] 자질에서 후건이 전건에 포함되는 일환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후건의 시간적 흐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실선(---)으로 표시하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저희들은 해보았습니다.

☞ 이것도 좋은 지적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속][동시][동시(일환)]의 그림들은 각각 비교될 수 있도록 그린 것입니다. 앞으로 [동시(일환)]의 그림에 자세한 보충설명을 더하기로 합니다.  

 

4. <표 5>에서 -느라고와 -느라를 나누어서 표를 제시하셨는데요, 고영근 선생님께서는 그 둘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고 조언해주셨습니다. -느라가 -느가로 잘못 표기된 것도 지적해주셨습니다.

☞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영근 선생님께 잘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5. (3)의 예에서 'a는 b가 -하느라(고) c가 -한다'라는 설명을 위해 'a=골목길, b=봉고차, c=틈'을 드셨는데 a에 c가 귀속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b가 귀속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지요?

☞ 위 구문은 'a는 b가 ~하다'(골목길은 봉고차가 왔다갔다 하다)와 'a는 c가 ~하다'(골목길은 틈이 없다)로 분석되고 b=봉고차와 c=틈이 각각 대주어인 a=골목길의 소주어임을 의미합니다.

6. 저희는 귀속된다는 성질을 규명하지 않아도 -느라(고)로 구성된 문장들은 그에 해당하는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선행연구에서는 전건과 후건의 주체가 동일하다고 지적되었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구문을 제시함으로써 주체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5편 텍스트과학

'간텍스트성, 변형, 다시쓰기'에 관한 질문

                                                                        (박금자)

 

1. '간텍스트'와 '간텍스트성'의 차이가 추상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논문에서 분석한 월인천강지곡을 통해 '간텍스트'와 '간텍스트성'의 차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십시오.

☞ 1번은 질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1번에 대한 답은 하지 않겠습니다. 논문을 더 자세히 읽거나 다른 책을 읽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2. '간텍스트'의 정의를 보면,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텍스트'라고 되어 있어서, 세 개의 텍스트가 설정될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분석하신 내용을 보면 '후텍스트'와 '간텍스트'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계신 듯합니다.  즉, ‘선텍스트’가 있고, ‘후텍스트’가 있어서 그 둘 사이의 ‘간텍스트성’이 확인되면 그 '후텍스트'를 '간텍스트'로 규정하시는 것처럼 해석됩니다.  ‘후텍스트’는 ‘간텍스트성’이 확인되기 이전의 개념이고, '간텍스트’는 '선텍스트’와의 ‘간텍스트성’이 입증된 후의 개념으로서, 지시하는 텍스트 자체는 동일하다고 봅니다(물론, ‘선텍스트’와 ‘간텍스트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 ‘후텍스트’는 ‘간텍스트’가 되지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저희들이 ‘간텍스트’와 ‘후텍스트’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요?

☞ 거의 정확하게 이미 파악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선텍스트가 있고 그를 인유하거나 인용하거나 모방하거나 짜깁기하거나 등등의 여러 기제를 작동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 후텍스트가 있을 때 둘 사이에 정말 간텍스트성이 있느냐를 따져 간텍스트성이 명백히 파악되면 그 후텍스트를 간텍스트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저도 생각합니다. 물론 간텍스트성을 파악하는 기준은 문학(혹은 문예학)에서는 보다 성근 듯 한데, 어학이나 국어학의 관점에서는 그보다는 치밀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고 그 사례를 그 글에서 실증적으로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니, 동일 텍스트가 결과적으로는 후텍스트가 되기도 하고 간텍스트가 되기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후텍스트는 간텍스트성이 완전히 파악되기 이전의 텍스트입니다.

 

3. ‘선텍스트’는 항상 ‘후텍스트’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어야 하나요?  저희는 여기서의 선후 문제는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분석할 때 기준이 되는 텍스트와 분석 대상이 되는 텍스트를 구분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저희들의 생각이 선생님의 논문에서의 개념과 일치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 추상적으로는 주장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있을까 싶습니다. 시간적으로 선텍스트가 후에 나온다는 일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가 있습니까?) 물론 선텍스트가 여럿일 가능성이 보이는 경우에 실제로는 한 간텍스트의 선텍스트가 가장 앞선 시기의 것이 아닐 수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말입니다.

 

4. 하나의 텍스트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 나온 아류작(?)들 사이에서도 간텍스트성을 점검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서로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지 않았을 수도 있고, 공간적으로 격리되어 있어서 매우 상이한 텍스트가 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

☞ 이미 답을 알고 계신데 물으신 것 같습니다. 아류작(물론 용어 정리는 하셔야 합니다) 사이의 간텍스트성 연구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표절이냐, 간텍스트적 관계이냐를 구분하여야 하는 부담이 있기는 하겠습니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문학계에서 몇 년 전 표절논란이 일었던 한 소설가의 글을 일부에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현상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옹호했었는데 간텍스트성 기준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한 바 있습니다. 작업이 수월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신데렐라 공주 이야기 같은 동화나 혹은 구전설화가 수 많은 국가와 지역에서 비슷한 원형을 가진 이야기로 전해내려 온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들 사이에는 간텍스트성이 있을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동화나 설화의 비교작업을 텍스트학의 관점에서는 아니지만 서양의 작가들이 한 것을 본 기억이 나기는 합니다.

 

『월인석보』 「안락국전」의 텍스트 구조

                                                                       (신지연)

 

1. 텍스트의 등가성을 논의할 때 장르에 따른 차이가 있으므로 우선 장르에 대해 고려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요?

☞ 등가성이란 여러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운문에서 형식(구조)가 큰 역할을 하고, 산문은 형식(구조)보다는 의미 관계가 더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먼저 고려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시대, 다양한 형식적 시도가 이루어지고 또 탈형식이 이슈가 되고 있는 현재의 문학적 경향에 비추어 본다면 산문과 운문이라는 장르 자체의 구분이 어떤 경우에는 무익할 수도 있으므로 장르에 대한 고려가 먼저 이루어지고 난 뒤 등가성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도식적인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제가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조적인 혹은 형식상의 등가성은 일차적으로 의미에 대한 고려 없이는 파악될 수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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